입력 : 2012.12.04 10:01
"아이가 2학년인데 오후 5시쯤 집에 들어가 처음으로 밝은 시간에 숙제를 봐줬어요." (40대 후반의 기혼 여직원)
"예전엔 느긋하게 차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런 시간을 저절로 줄이게 돼요. 일찍 퇴근하려면 집중해서 일해야 하니까요." (미혼직원)
아침 9시 출근, 오후 4시 퇴근으로 하루 6시간만 일하는 '보리출판사' 직원들의 이야기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식사도 거르고 출근해 한밤이 돼서야 퇴근하는 직장인들에겐 그야말로 '꿈의 직장'이다.
보리출판사는 '주 30시간 근로제'를 도입해 실천하고 있는 회사다. 정규직 근로자의 법정 근로시간 8시간을 지키기도 어려운 현실에서 주 30시간만 근로하는 환경을 정착시킨 것이다.
충북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윤구병 보리출판사 대표는 회사의 주인은 직원들이라는 생각으로 하루 6시간 근로제를 도입키로 했다. 도입과정에서부터 직원의 토론과 참여를 보장하는 등 노사 간에 긴밀히 소통하고 협력했다.
국내에선 본보기가 될 만한 사례를 찾기 어려워 전 직원이 직접 해외책자를 참고삼아 도입방법을 연구하고 2개월에 걸쳐 '10조23항'에 이르는 시행 규칙을 만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하루 6시간 일한다고 해서 임금이 줄어들거나 노동 강도가 높아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조건도 합의를 통해 내걸었다.
보리출판사는 하루 6시간 근로제뿐 아니라 불필요한 노동을 줄여 일자리를 나누고 지역공동체와 공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을 노사합의문에 명시하고 있다. 합의문엔 '과도한 근로시간은 아내와 자식과 형제자매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문구가 포함돼 있을 정도다.
최근 보리출판사처럼 장시간 근로관행을 개선해 양질의 일자리를 나눌 수 있는 발판을 만들고 공동체와 공생하는 여건을 조성하는 등 '노사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종전까지 강조돼 왔던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 근로자의 최저임금과 노동권 보장, 환경보호 등 제도에 규정돼 있는 의무를 준수하자는 소극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면 '노사의 사회적 책임'은 보다 적극적인 개념이다.
노사의 사회적 책임은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노사 공동의 책임과 그 활동'으로 공생발전을 위해 노사가 그동안 누려온 기득권을 취약계층과 나눈다는 의미가 있다.
고용노동부는 올해 이 같은 노사의 사회적 책임이 사회 전반에 확산될 수 있도록 노사정 공동협약 실천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에도 사업장, 지역단위 노사의 사회적 책임 공동선언이 줄을 이었지만 실천으로 이어지기엔 부족한 측면이 있었다.
올해는 노사의 사회적 책임에서 핵심으로 꼽히는 △장시간 근로개선을 통한 양질의 일자리 창출 △비정규직 근로자 등에 대한 차별개선 및 고용안정 △공정거래 질서 확립 등 대·중소기업 상생 △지역공동체 동반성장 등 4가지 가치를 명확히 명시하고 우수실천사례를 발굴해 지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기업 현장에서도 속속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지난 2005년 창업 이후 국내 APM(애플리케이션 퍼포먼스 매니지먼트) 솔루션 시장에서 점유율 70%를 차지하고 있는 제니퍼소프트도 우수사례 중 하나다.
제니퍼소프트는 노사합의를 통해 근무시간을 혁신적으로 단축하고 직원에 대한 보상, 복지 등에 투자한다는 원칙을 정하고 실천에 옮겼다. 오전 10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는 하루 7시간, 주당 35시간 근무를 정착시켰고 연차휴가도 법정기준보다 5일씩 더 부여해 평균 20~25일을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사옥 1층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카페로 만들었고 직원 가족이 마음껏 드나들 수 있도록 놀이공간, 야외정원, 수영장, 옥상텃밭도 만들었다. 동일한 노동을 하면서 임금 수준은 낮은 비정규직 직원은 가급적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고 직원 자녀들과 놀아주는 영어 원어민 교사와 카페 바리스타도 정규직으로 채용했다.
대기업들도 비정규직 인력을 정규직으로 단계적으로 전환하고 근로여건을 개선하는 등 노사관계 선진화에 힘쓰고 있다.
전체 1580여 명 가운데 220명을 비정규직으로 채용하고 있는 수협은행은 지난 2008년부터 비정규직 처우개선을 위해 기존 인사제도를 체계적으로 정비해오고 있다. 2009년엔 계약직 직원을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해 고용을 보장했고 2010년에도 기간제 입사자 전원이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됐다. 2010년부터 무기 계약직을 대상으로 정규직 전환시험을 매년 2월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기존 근무시간을 모두 근속에 포함시켜주고 있다.
케이블방송과 초고속인터넷업체 CJ헬로비전도 본사 300명 직원 중 30여 명의 기간제 근로자를 대상으로 6개월간 업무능력, 태도에 대한 평가를 거쳐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줬다. 지난 5월 5명의 기간제 근로자가 평가대상에 올라 전원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이밖에 넥센타이어, 조선내화 등 많은 기업들이 노사관계 자체뿐만 아니라 지역공동체와의 동반성장을 위한 '노사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협약을 체결하고 실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고용부 관계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노사의 사회적 책임은 아직 생소하긴 하지만 많은 기업에서 필요성을 깨닫고 실천의지를 다지고 있다"며 "내년에는 보다 많은 우수사례가 나오고 기업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