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빅데이터·IoT 올인…사업재편도 관심
“혼자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없다. 새로운 ICT(정보통신기술) 생태계 투자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박정호 SK텔레콤 신임 사장(54)이 얼마 전 열렸던 ‘CES 2017’에서 내놓은 일성이다. 말 그대로 SK텔레콤은 AI(인공지능)와 IoT(사물인터넷) 등 신사업에만 5조원을 쏟아붓는다.
구체적으로는 자율주행과 커넥티드카, 인공지능·빅데이터, IoT 기반 스마트홈과 에너지 관리, 가상·증강현실(VR·AR), 콘텐츠 글로벌화 등에 투자한다. 같은 기간 5세대(5G) 이동통신망 설비 투자에 6조원을 들이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금액이다. SK텔레콤은 이번 투자를 통해 구글식 개방형 ICT 생태계를 하루빨리 구축한다는 복안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관련된 신사업을 SK텔레콤이 앞장서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놓은 것이다.
야심찬 계획의 이면에는 불안정한 경영 환경과 통신업의 정체에서 오는 절박함이 깔려 있다. 업계와 증권가에 따르면 이동통신 3사의 지난해 매출은 SK텔레콤 17조1220억원, KT 22조1470억원, LG유플러스 11조1750억원 등으로 2015년 수준에 머문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SK텔레콤은 매출이 3년 연속 소폭 역성장했다. 이동통신 3사 전체 영업이익 규모도 2014년을 제외하면 3조원대 후반 수준에서 정체돼 있고, 더욱이 SK텔레콤은 최근 3년(2014~2016년) 연속 줄어들 전망이다. SK텔레콤의 한 임원은 “더 이상 국내 시장에서 이동통신 1위 타이틀을 고수해서는 생존도 보장받기 힘든 게 현실”이라 토로했다.
SK텔레콤의 수장이 2년 만에 박정호 사장으로 바뀌게 된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 직전에 SK㈜ C&C 사장을 역임했던 박 사장은 지난 2년여간 SK㈜ C&C를 이끌면서 ‘IT서비스’라는 전통적인 업의 성격을 버리고 ‘데이터 서비스 기업’이라는 화두를 제시하며 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홍하이, IBM 등 글로벌 기업들과 손잡고 인공지능, 클라우드, 스마트팩토리 등의 분야를 선도하며 ICT업계 새 모델도 제시했다.
특히 IBM과 협력해 AI 왓슨의 한국어 개발을 주도한 경험이 주목받는다. 머신러닝과 AI가 ICT 분야의 핵심 기술이 될 것이라고 판단, 당시 가장 협력 조건이 좋고 상용화 수준이 높은 왓슨과 협력을 추진해 왓슨이 습득할 8번째 언어로 한국어 버전을 개발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박 사장은 ‘전략적 파트너십의 달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박 사장과 함께 일한 경험이 있는 SK텔레콤 임직원들도 환영하는 분위기다. 박 사장은 평소 업무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직원들에게 권한 위임을 잘하는 스타일로 정평이 나 있다.
SK텔레콤의 한 간부는 “솔직한 성품이라 후배 사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후배들을 믿고 맡기면서도 업무와 관련돼 문제가 발생하면 직접 해결에 나서 일명 ‘경상도 사나이’로 통한다”고 전했다.
박 사장은 마산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89년 선경에 입사했다. 이후 SK텔레콤 뉴욕사무소 지사장과 SK그룹 투자회사관리실 상무, SK커뮤니케이션즈 사업개발부문장, SK텔레콤 사업개발부문장 등을 두루 거쳤다. 2014년 말 SK C&C 사장에 올랐고, 2015년 SK C&C와 ㈜SK가 합병되면서 SK㈜ C&C 대표이사가 됐다. SK㈜ C&C의 한 임원은 “박 사장은 그룹 내 대표적인 인수합병(M&A)·신사업 개발 전문가다. 과감한 사업구조 혁신과 글로벌 사업 실행력을 보여왔던 만큼, SK텔레콤에서 이동통신·사물인터넷·미디어·플랫폼·반도체 등 다양한 분야 간 융합과 혁신을 이끄는 데 적임이라는 의견에 이론이 없다”고 강조했다.
▶기존 통신사업 정체
▷성장동력 발굴 최대 과제
그룹 총수 최태원 회장의 신임도 각별하다.
박 사장은 2003년 SK가 헤지펀드 소버린과 경영권 분쟁을 벌일 때 최 회장의 비서실장을 지내며 보좌했다. 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최 회장에게 박 사장은 계열사 CEO라기보다는 경영 동지에 가깝다. 평소 최 회장과 기탄없이 의견을 교환하는 핵심 참모 중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실제 최 회장은 그룹 차원에서 중요한 현안이 있을 때마다 핵심 보직에 박 사장을 중용했다. SK하이닉스 인수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SK텔레콤 사업개발실장이던 2011년 하이닉스반도체 인수 팀장을 맡아 진두지휘했다. 당시 최 회장 주변에선 적자 상태에 있던 하이닉스 인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SK에 인수된 하이닉스는 반도체 호황과 함께 그룹의 핵심 계열사로 자리 잡았다.
2015년 SK C&C와 ㈜SK의 합병 작업을 맡은 것 역시 박 사장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박 사장은 당시 SK그룹의 최대 경영 현안 가운데 하나였던 ‘옥상옥(屋上屋)’ 지배구조를 해소시켰다.
그룹 총수와 임직원들의 기대가 높은 만큼 박 사장에게 주어진 숙제도 만만치 않다.
당장 박 사장이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는 과제를 부여받았다고 해도 실적 부진이 이어질 경우 경영 행보에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다. 실적 개선이 이뤄지지 않으면 연구개발이나 신사업 투자에도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박 사장은 실적 개선을 위해 자회사의 사업 경쟁력 강화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SK텔레콤은 2016년 3분기까지 별도 기준 영업이익이 연결 기준 영업이익보다 많았다. 자회사 실적이 그만큼 부진했다는 의미다. SK텔레콤은 본업인 이동통신 사업의 경우 견조한 실적을 냈지만 SK브로드밴드와 온라인쇼핑몰 ‘11번가’를 운영하는 SK플래닛 등 자회사들의 비용이 늘어나면서 발목을 잡았다. SK텔레콤 관계자는 “박 사장이 올해에는 무엇보다 실적 후퇴에 종지부를 찍으려 할 것”이라며 “현재 미디어와 사물인터넷 등 플랫폼을 강화하면서 다른 자회사 사업들도 재정비해 나갈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박 사장 임명과 함께 단행된 조직 개편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 SK텔레콤은 전 조직을 CEO 직속으로 편제해 변화와 혁신을 박 사장이 직접 주도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밖에 SK텔레콤은 데이터 중심의 상품·서비스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데이터 사이언스 추진단을 신설하기로 했다. 플랫폼 서비스 개발에 주력하는 플랫폼 사업부문도 새로 생긴다.
▶지배구조 개편 어떻게
▷SK하이닉스 자회사 승격
지배구조 개편 과제도 앞에 놓여 있다.
박 사장은 그룹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직접적으로 관여해온 전력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박 사장이 ‘SK㈜→SK텔레콤→SK하이닉스’로 이어지는 구조(그래프 참조)에 손을 댈 가능성이 점쳐진다. SK하이닉스가 지주사의 자회사로 올라서면 공격적인 투자가 수월해진다. 현재는 지주회사법상 지분 규제에 묶여 투자 활동에 제약이 많다. 지주회사의 증손회사는 100% 출자법인만 가능하도록 돼 있는 데다, M&A를 진행해도 일부 지분만 사야 하고 합작법인 설립도 쉽지 않다.
실적이 좋은 SK하이닉스가 지주사 SK㈜의 자회사가 되면 오너가의 배당수입도 늘어난다. 시장에선 지배구조 개편 방안으로 SK텔레콤 인적분할 방식을 유력하다 본다. SK텔레콤을 SK하이닉스 지분을 보유한 SK텔레콤홀딩스(가칭)로 분리한 이후, SK㈜에 합병한다는 시나리오다. SK그룹 고위 관계자는 “SK텔레콤과 하이닉스 등 그룹의 ICT 계열사 구조 개편 작업을 박 사장이 진두지휘하게 될 공산이 크다. 결국 지난해부터 이어진 그룹 개편 작업의 화룡점정의 실무를 박 사장이 맡게 되는 것”이라며 “이와 동시에 신규 사업을 성장시켜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 만큼, 필요하다면 과감한 인수합병에 나설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